나의 이야기

대모산 납회산행-스토리텔링

초 은 2024. 12. 26. 20:36

대모산(大母山/서울강남 293m)은 모양이 늙은 할미를 닮아 할미산 혹은 대고산(大姑山)이라 했다가 태종(太宗/조선3대왕)의 왕릉이 조성된 후 대모산(大母山)이라 불렸다 한다. 보성고59회 산악회가 금년도 납회산행을 대모산을 지나는 서울둘레길9코스로 결정했고, 2024.12.22.() 산행을 했다. 그런데 납회산행 후기로 대모산과 인연이 있는 세종대왕(世宗大王/조선4대왕) 이야기를 올릴까 한다.

 

세종대왕은 대모산 자락에 아버지인 조선3대왕 태종(太宗/李芳遠)과 어머니인 원경왕후의 왕릉을 쌍릉(雙陵) 형식으로 조성하여 헌릉(獻陵)이라 명했고, 나중에 본인도 이 근처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왕릉에 관한 일화 중 아버지는 할아버지(太祖/이성계)가 돌아가실 때 할머니(신덕왕후) 묘소인 정릉(貞陵)에 합장하길 유언했지만 따로 건원릉(健元陵/경기도구리)을 조성했고, 정릉은 아예 도성(都城) 밖 후미진 곳으로 옮겨버리지 않았던가.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 왕위(王位)를 차지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해했던가. 고려 충신인 정몽주와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비롯하여 친인척인 형제와 처남들까지도 무참히 죽인 사람이 아니던가. 세종은 조선이 건국(1392)되고나서 출생(1397)했고, 아버지가 왕으로 있으면서 애지중지 키웠고, 왕세자로 책봉(1418)되고 바로 즉위(卽位)하여 32(1418~1450)간 성군(聖君)으로 추앙받아 아버지의 과거지사를 몰랐던 것인가. 하여간 세종은 헌릉을 조성하고 그 서쪽 언덕에 본인이 묻히기를 원했다. 당시 그 자리는 풍수지리상 흉()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아버지 곁에 묻히길 소원한 세종은 부인(소헌왕후)가 승하(1446)하자 먼저 그곳에 왕릉을 만들었고, 본인이 승하(1450)하자 유언대로 부인과 합장했고 왕릉의 이름은 영릉(英陵)이 되었다. 결국 아버지 곁이 좋다고 소원대로 죽어서도 대모산 자락 아버지 곁으로 갔다.

세종의 큰아들인 문종(文宗/재위 1450~1452)이 일찍 승하하고 큰손자 단종(端宗)이 어린나이에 조선6대왕으로 올랐으나 셋째아들인 세조(世祖/수양대군)이 조카(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렇듯 조선은 건국 후 77년 동안 제8대왕인 예종(睿宗)까지 왕위가 8번이나 바뀌었는데, 재위기간이 태종(18)과 세종(32)50년인 걸 생각하면 파란만장한 왕조라 아니할 수 없겠다. 결국 아버지 곁에 있는 세종의 영릉(英陵)이 후손들에게 나쁘다하여 셋째아들인 세조가 아버지 왕릉을 경기도여주 명당자리로 천장(遷葬)하기로 했고 왕릉을 완전하게 조성한 것은 손자인 예종(睿宗) 때 일이다. 그리고 400여년 후 헌릉 옆으론 경기도파주에 있던 조선23대왕 순조(純祖)의 인릉(仁陵)이 옮겨와 현재 대모산 남쪽 자락엔 헌릉과 인릉이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역대 왕 중 왕권에 집착한 태종의 헌릉(獻陵) 지근거리에 30년 전 국가정보원이란 국가기관이 이전해왔다.

대모산 건너편 마주보이는 곳에 광평대군묘역이 있다. 이곳 역시 세종대왕 스토리텔링이 될 만하다. 광평대군은 세종의 다섯째 아들이다. 아버지(태종/이방원)가 이복동생인 무안대군(撫安大君/이방번)을 살해하여 후손이 끊기자 세종은 아들인 광평대군을 무안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명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