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베드로)의 후손 한의사

초 은 2014. 9. 25. 15:04

 한국최초의 천주교 영세자 이승훈(李承薰;베드로)은 평창이씨(익평공파) 23세손이다.

병조참판을 지낸 아버지(이동욱)와 어머니(여흥이씨) 사이에서 1756년 출생했다.

 정약용 형제 등 과 교류하며 서양신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고, 1780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1783년 동지사인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루이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한국천주교 최초의

영세자(베드로)가 됐다.

 셋째아들인 이신규(李身逵 세례명;마티아 1793년~1868년)가 한의사(儒醫)이다.

이신규는 신유박해(1801년) 때 어린나이로 조부와 함께 부친의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부친이 순교하는

아픔을 겪었다. 천주교신자로 기해박해(1839년) 때 체포됐으나 학문과 의술이 뛰어나서 석방됐다.

1841년 인천영종도로 거처를 옮겨 의술을 베풀다가 병오박해(1846년) 때 김대건(한국최초의 천주교사제)

신부와 관련되어 체포됐다. 이후 다시 석방되자 인천제물포에서 한의업에 종사했다.

철종 7년(1856년) 일성록에 의약동참차하(議藥同參差下)로 순원왕후<純祖妃)>의 위중한 병을 쾌차시킨

기록이 있다. 병인박해(1866년) 때 구금됐다가 풀려난 후 무진박해(1868년) 때 76세 고령의  나이에

다시 잡혀 그해 음력 윤 4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인천시 남동정수사업소 뒤쪽에 위치한 이승훈 산소 전경 / 1981년11월28일 이승훈의 묘를 개봉하여

  유해는 천진암(경기도광주)으로 이장했고 현재 가묘만 있다>

 

 

 

<아버지(이승훈) 산소 아래쪽에 나란히 있는 장남(택규)과 삼남(신규)의 산소>

 

증손자인 이학호(李鶴浩 1850년~1934년)는 어려서부터 유의(한의학)교육을 받았으며

무진박해(1868년)로 유랑 중에는 의학에만 전념했다. 의술이 알려지자 1894년 고종황제가

천주교와 관련한 죄를 사면하고 등용했다.

1901년에 군부주사로 임관, 1902년에 태의원 겸 전의에 제수됐고, 1903년에는 왕세자(영친왕)의

병환을 치료하여 통정대부(정3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1906년에 가선대부(종2품)에 이르렀다.

대한제국(고종황제) 수립 이듬해인 1898년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 창립에 앞장섰고

제2대회장을 역임했다. 일제의 침략으로 1907년 대한의원(국립병원) 관직에서 강제 면직됐다.

이후 한의사(의생면허 113번)로 1910년에는 한의학 부흥과 관련하여 조선의사연찬회 참사장을

하였고, 1913년 조선의생회간사장, 1925년 동서의학연구회고문을 하였다.

일제치하에서 한의사로 애국계몽활동을 한 경기지역의 남인계열 선비정신이 투철했고,

가족은 1871년 순교한 두 동생(천호 만호)을 비롯하여 대부분 천주교신자이다.

이학호는 천주교박해로 가세가 기울고 자신도 일제치하에서 핍박을 받아 생활이 곤궁해져

명문 평창이씨 집안이지만 산소가 초라했다.

직계가족과 의논해 서거 80주년이 되는 올해 업적을 새긴 묘비를 설치했다.<2014.9.25>

 

 

     <2014년9월 25일 이학호 산소에 묘비를 세웠다>

 

 

 

  <시흥군자동에 있는 이승훈의 부친(이동욱) 및 선산묘지 모습>

 

 

    <평창이씨(익평공파) 이승훈의 직계가족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