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이다. 하룻밤만 자면 한 살 더 먹는다고 좋아했던 다섯 살 때 일이 생각난다.
분명히 설빔으로 받은 까만색 장화를 신고, 눈길에 아버지 손을 잡고, 면사무소 동네를 신나게
돌아다닌 게 이때다. 최면(催眠)을 건다 해도 내가 기억하는 것 중 내 생애 최초의 일이 분명하다.
그쯤 아버지를 따라 작은고모가 시집살이하셨고, 작은아버지가 교편생활 하셨던 여주(驪州)에
간 것이 앞뒤 잘려 토막으로 생각난다.
어제(3일) 여주(驪州)엘 다녀왔다. 이천(利川)이 고향이니까 과히 멀지도 않고 가끔 골프 치러 가는 곳인데, 세모(歲暮)에 밀려온 감상(感想)에 겨워 일부러 찾았다. 빗속에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내가 강가 옆 대장간에서 놀고 있을 때 아버지는 작은고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부뚜막의 흙을 긁어먹는 사촌동생을 신기하게 보고 있을 때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부엌방에서 국수를 잡수셨다. 토막 난 기억은 그것이 전부고 아버지는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았다.
우산을 쓰고 멍하니 있자니 아버지가 우산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 황학산수목원(여주 매룡동)엘 들렸다.
4일이 입춘(立春)이라 봄꽃을 볼까 해서 갔는데 비가 와서 제대로 구경을 못했다.
복수초를 못 봐서 아쉬워하니까 직원이 이런 날은 작은 꽃은 잘 안 핀다고 하면서
전날 직원이 찍은 복수초와 애기노루귀 사진을 보여주며 내게 전송했다.
하루 종일토록 비다. 갯버들이 빗물이 올라 한결 풋풋하다. 겨울비가 성가시지만 겨울 가뭄에
도움은 될 성싶다. 이번 외출이 아버지 생각 탓이라 에두르지만 한 살 더 먹는 게 반갑잖은 나
또한 요새 자식들 생각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20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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